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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난방 문화- 구들 , 온돌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8-09-20 00:44     조회 : 1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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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난방 문화- 구들 , 온돌
온돌 그 찬란한 구들 문화에 대하여…
김준봉,
‘구들’은 한국인의 고유의 난방 방식으로 ‘구운 돌 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따뜻하게 바닥에서 열기를 발산한다는 뜻으로 흔히 ‘온돌(溫突)’이라고도 부른다. 구들은 조상의 슬기가 담긴 우수한 난방법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주거 건축과 주거 생활의 여러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구들 이야기’는 우리의 난방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집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구들을 이해하면 우리의 주거가 왜 그러했는지,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왔고, 오늘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이해하기가 쉽다. 구들을 이해하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보인다.
 외국에서 장기간 살아본 사람은 한국의 이것저것이 그리울 때를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물이 질퍽질퍽 나는 배일 수도 있고, 고향집 장독대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외국의 중국 음식점에는 없는 자장면일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나 누구나 공통적으로 매우 그리워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따듯한 우리의 방바닥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눈이 많고 추운 날씨면, 그리고 감기몸살기라도 느껴지는 날이면 한국인은 따듯한 방바닥을 그리워하고 , 그리고 그것은 방바닥 중에서도 특히 따끈따끈한, 이제는 한국에서조차 얼마 남지 않은 옛날집의 아랫목, 따끈따끈하다 못해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듯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구체화된다.
 구들은 바닥 난방법이다. 바닥 난방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바닥 난방은 병원이나 부유한 집의 거실에서나 가끔 만날수 있는 고급 난방법으로 인식되는 편인데 비해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바닥 난방이 있다. 아흔아홉 칸의 기와집에서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 오막살집에서도, 주인이 머무는 방에도, 머슴이 자는 방에도, 고층, 그리고 초고층 아파트에도, 단독 주택에도, 함경북도에도, 제주도에도, 그리고 중국 연변에도…….
 이 바닥 난방을 우리는 흔히 온돌(溫突)이라 한다. 그러나 ‘구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단순히 토속적인 어감 때문이 아니라 ‘구들’이란 이름은 ‘온돌’이란 이름보다 더 오래된 이름이고, ‘온돌’처럼 한자에서 연유한 이름이 아닌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들을 이루는 세부 명칭이 모두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 아궁이, 부뚜막, 고래, 불목, 부넘기, 개자리등 구들을 이루는 여러 세부 명칭이 모두 우리말로 전해 내려왔는데 굳이 총체적인 이름에서는 즐겨 쓰던 ‘구들’이란 순수 우리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온돌(溫突)’이란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구들이란 말은 민속학자 손 진태 선생에 의하면 ‘구운 돌’에서 생겨난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리 대중적으로 쓰이던 말이다. 이를테면 방이 어지러우면 ‘구들 좀 치워라’ 했고, 일자리를 잃고 놀고 있는 사람은 ‘구들방만 지키고 있다’거나 ‘매일 구들장만 지고 있는 신세’리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반면 온돌(溫突)이란 말은 우리 문자가 아직 없을 때 식자(識者)들이 구들을 기술(記述)하기 위해 만든 한자 이름으로, 특히 한자를 즐겨 쓰던 초기 학문적 연구에서 그대로 사용한 영향으로 보인다
 구들은 우리의 옛날집에서의 바닥 난방 시설 그 차제를 말하거나 그런 난방으로 된 방바닥 또는 방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구들장은 고래를 덮으며 방바닥을 이루는 판판한 판석(板石)을 말하니 하릴없이 누어 빈둥대는 사람은 구들장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온돌이란 이름을 완전히 피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구들이 어울리는 이림이라 하더라고 구들이 온돌이요, 온돌이 구들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각기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아직 많은 학자들은 곳곳에서 온돌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년 전부터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오르긴 했어도 ‘구들’이 아니라 ‘온돌’로 찾아야 하고, 한자도 우리말, 우리글의 일부를 이룬 지 오래되니 대세가 바뀌지 않는 한 ‘온돌’이란 말을 무시할 수도 없다.
 구들이란 이름은 또 엉뚱한 곳에서 취약함을 보여 주는데 오늘날 생활의 일부가 되어가는 인터넷 세계에서이다. ‘구들’을 색인해보면 구들 관련 내용보다는 ‘~ 친구(親舊)들’,  ‘~ 기구(機構)들’ 이 잔뜩 검색되어 나오고, 우리의 ‘구들’은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찾기처럼 힘들다. 검색 엔진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이 점을 고려해서 ‘구들’로 검색해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난방 방법에 접근이 쉽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되도록 구들이란 말을 사용하려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세부 명칭과의 조화를 고려한 것이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간혹 온돌이라고 하여도 구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의 변화 등을 말할 때는 문맥상 ‘온돌’이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전통 구들의 구조>
 
구들(온돌)의 구조는 크게 불을 때는 곳인 ‘아궁이’,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인 ‘고래’, 그리고 연기가 밖으로 배출되는 ‘굴뚝’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구들에는 수천 년 동안 궁리하고 발전시켜 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구석구석 스며 잇음을 알 수 있다.
 4~50대 어른들까지는 구들을 경험하여 대개 아는 것이지만 현대적 주거에서 성장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구들이 벌써 낯설고, 커오는 세대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므로 이들의 이해를 위하여 전통 구들의 구조를 먼저 설명하기로 한다.

아궁이
 아궁이는 불을 때는 곳으로 보통 부엌에서 부뚜막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사랑방이나 별채의 방과 같이 취사(炊事)는 필요 없고 난방만 하면 되는 곳에서는 부뚜막 없이 아궁이만 두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간단한 부뚜막이라도 만들어 솥 하나라도 걸어두면 세수나 빨래할 때 더운물을 쑬 수 있고 큰일을 치를 때 여러모로 유용하므로 부엌이 아닌 곳에 두는 아궁이도 작으나마 부뚜막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뚜막
 부뚜막은 솥을 걸어 취사를 할 수 있도록 돌과 진흙으로 쌓아 부엌 바닥보다 높게 만든 시설이다. 솥 바로 밑은 불이 타는 곳으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널찍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부뚜막 위의, 솥이 걸린 앞 공간은 칼도마를 얹고 무나 파를 썬다든가 생선을 다듬는 작업대로 쓰였다. 부뚜막 위에는 아궁이 하나에 솥을 하나 거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솥을 좌우로 두 개 걸기도 하고 심지어 그 뒤편에 작은 양은냄비 같은 것을 하나 더 걸어 한 아궁이에 세 개의 솥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솥 옆은 보통 어느 정도 빈자리가 마련되어 밥상을 놓고 상을 차릴 수 있도록 하였고, 솥 주변 공간은 밥이나 국을 풀 때 잠시 빈 그릇을 놓는 자리가 되었다.

부넘기
 아궁이 속 안쪽 벽 상부에 고래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 보통은 하나의 구멍이지만 고래가 여러 줄이 될 경우에는 돌을 사이에 받쳐 구멍이 두 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불이 넘어가는 고개와 같아 ‘부넘기(부넹기)’ 또는 ‘불고래’하고 하고 좁혀진 목구멍 같다하여 ‘불목’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연기의 역류(逆流)를 방지하고 열기가 고래 속으로 잘 빨려들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고래
 고래는 연기가 구들장을 데우며 지나가는 통로로 ‘방고래’, ‘구들고래’라 하기도 하고 한문으로 ‘연도(煙道)’라 하기도 하는데 뜨거운 연기가 잘 들어가도록 아궁이보다 높이 있다.
 고래의 종류는 굴뚝을 향하여 나란히 뻗은 ‘줄고래’, 작은 기둥으로 구들장과 방바닥을 받치고 잇는 형태의 ‘허튼고래’, 그리고 줄고래와 허튼고래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혼합고래’로 대별되고, 더 나아가 만든 모양에 따라 ‘부채고래’, ‘맞선고래’, 그리고 굴뚝이 아궁이 근처에 있어 연기가 아궁이 옆으로 되돌아 나온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되돈고래’등으로 구분된다. 지역에 따라 뚜렷이 고래라 할만한 공간을 따로 두지 않고 막돌로 바닥에 채워서 돌들 사이의 빈 틈 사이로 연기가 통하게 한 ‘막고래’ 또는 ‘멍텅구리고래’라 하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 고래의 중류는 ‘줄고래’이다. ‘제3장 유적으로 보는 구들 이야기’에서 보게 되지만 구들은 ‘줄고래’로 시작되었고 줄곧 줄고래로 발달하였다. 뒤에서 천천히 설명되겠지만 그것 또한 의미가 심장하다.
고래 바닥은 고래의 종류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보통 방 끝 쪽으로 약간 경사져 올라가게 만드는데 이것 또한 따듯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활용하여 연기가 순조롭게 이동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래둑
 고래둑은 고래의 골(고랑)을 만드는 둑이다. 또한 고래둑은 구들장을 얹는 받침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고래둑과 구들장이 굴 또는 터널 모양의 고래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고래둑은 돌을 이어서 놓아 만들기도 하고 돌과 진흙을 섞어서 쌓고 둑 전체를 진흙으로 싸 바르는 방법이 있다. 물론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쌓아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바닥 흙을 다진 후 골 부분을 파내는 방법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래둑은 때때로 중간을 끊어서 인접한 고래 간에 연기가 서로 약간씩 소통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허튼고래에서는 돌, 벽돌 등 불연 재료로 된 짧은 동바리 기둥이 고래둑 역할을 대신한다.

구들장
 구들장은 고래를 덮는 평평한 돌을 말한다. 구들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래의 일부이며 고래를 완성해 준다. 구들장은 대개 청석 또는 화강암 계통의 평평한 자연석을 수집하거나 돌산에서 떼어 내서 썼다. 이러한 구들장은 그 밑의 고래를 통과하는 연기에 의해 가열되어 그 위의 방의 공기를 데워주는 기능을 하는 한편, 열을 저장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방안 공기를 데워준다.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뚜껑돌, 뚜껑석, 덮개돌, 덮개석, 천정돌이 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자의 개석을 풀어 쓴 말들이다. 이러한 말들은 다른 곳에도 쓸 수 있는 말이므로 ‘구들장’으로 통일하여 부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개자리
 또한 고래가 끝나는 부분에는 고래의 끝 부분보다 우묵하게 낮춘 ‘개자리’ 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줄의 고래로부터 연기를 한 곳으로 모아서 굴뚝으로 배출하는 기능과, 연기의 역류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며, 또한 경우에 따라 있을 수 있는 빗물 같은 것이 고래 속으로 유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굴뚝
 굴뚝은 집 밖에 서 있는 연기 배출 장치로 아궁이가 구들 시설의 시작인데 비하여 그 끝부분을 이루고 있다.
 굴뚝은 가정 형편과 자연 조건에 따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 판자, 통나무, 오지 토관, 항아리, 벽돌, 기왓장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썼다.
 함경도 같은 곳에서는 굴뚝을 ‘구새’라고도 한다. 나무가 오래되면 속이 비고, 이를 "구새 먹는다"고 하는데 굴뚝을 ‘구새’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속이 빈 나무를 베어다가 굴뚝으로 많이 쓴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통 주거에서는 종종 굴뚝을 따로 만들어 세우지 않고 연기가 그냥 기단 끝으로 나오게 한 경우도 있다.

굴뚝개자리
 굴뚝 밑에는 다시 움푹 파여 있는 곳이 있고 이곳을 ‘굴뚝개자리’라 한다. 굴뚝개자리 역시 연기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며, 굴뚝을 따라 올라가는 연기 중에 아직 다 타지 못한 찌꺼기가 떨어져 모이는 곳이다.

구들장이
 보통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구들을 직접 놓았다. 그러나 인근에는 구들을 잘 놓기로 소문나 여기 저기 불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장인들을 ‘구들장이(구들쟁이)’라 불렀는데 구들장이마다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었고 그들의 비법에 따라 난방성능에도많은차이가 났다. 불이 잘 들이는지, 골고루 따듯한지 그리고 구들이 얼마나 오래 따듯한지는 구들장이의 솜씨에 따라 많이 좌우되었다. 요즈음은 ‘구들장이’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다른 분야의 장인들은 ‘전통 기능 보유자’로 등록되어 기술이 보존되고 있지만 ‘구들장이’들은 제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땔감
 예전엔 땔감이 주로 나무였다. 소나무나 참나무가 많이 쓰였지만 어떤 나무나 땔감이 되었다. 소나무는 불을 붙이기 쉽고 잘 타기 때문에, 참나무는 화력이 좋기 때문에, 땔감으로 선호되었다. 보통 때는 나무의 잔가지와 줄기들을 땔감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한겨울에는 통나무를 톱으로 알맞은 크기로 잘라 쪼개어 비축하여 두었다가 요긴하게 썼다. 잔가지와 줄기가 대부분인 땔감은 ‘마들가리(마들가지)’라 하고 통나무를 쪼갠 것은 ‘장작’이라 한다.
 예전에는 나무하기, 장작 패기가 농한기 남정네들의 중요한 소일거리였다. 말똥, 쇠똥 같은 것은 대부분 퇴비로 쓰였지만 곳에 따라 말려서 땔감으로 쓰기도 하였다. 떨어져 마른 솔잎은 낙엽이라 하지 않고 ‘솔가리’라 하는데, 강원도에서는 ‘소갈비’라 하기도 하였다. 솔가리는 주로 불쏘시개로 쓰였는데 간단히 밥만 할 때는 그것만으로 땔감은 대신하기도 하였다.
 매우 추울 때는 솥에 쌀을 안치고 취사를 하기 전에 먼저 얼마간 불을 땠는데 이를 "군불 땐다"고 하였다. 나중에 나무가 귀해진 후에는 땔감으로 연탄이 나무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 후엔 화석 연료인 가스와 기름으로 바뀌었다.


<사라지는 구들 유적들>

구들 유적 관련 발굴 보고서들을 검토하다보면 새로운 유적들은 의외로 고속도로 신설이나 도로 확장 공사를 계기로 세상에 많이 들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아니면 도시 주변에서는 대규모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터파기를 하다가 일부가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발굴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북한에서 발굴된 고구려 시대의 주요 구들 유적도 댐 공사에 따라 수몰될 지역을 발굴하면서 드러난 것도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발굴되어 드러난 사례보다는 땅 소게 묻혀 있는, 어쩌면 영원히 빛을 못볼 옛 사람들의 흔적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드러난 고대 구들 유적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으나 대체로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고 구들장은 예나 지금이나 재사용하기 좋아 그대로 벼려지지 않고 다시 사용되어 근본적으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각 지역에서 발굴된 사례들만 해도 그 보급이나 전파 정도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문제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구들 유적들도 이와 같이 건설 공사와 관련하여 시간에 쫓기며 시급하게 발굴되고, 또 발굴이 끝나면 현장은 보존되지 못하고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책에 수합된 유적들도 이미 발굴된 현장에서는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대안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구들은 우리의 중요한 전통 문화이므로 좀 더 많은 현장이 보존되어 후손들의 학습장이 되었으면 한다.

<구들 관련 문헌>
 
구들과 관련하여 문헌상으로는대체로 500~513년에 씌어진 [수경주]의 관계사 기록이 가장 오래되고, 그 다음으로 940년에 간행된 [구당서]의 장갱 운운하는 기록이 된다. 따라서 기록상은 [수경주] 부터 시작되지만 [구당서]의 경우는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므로 7세기 이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고 구들이 최소한 고구려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다만 [구당서] 기록은 아마도 한두 줄의 고래를 묘사한 듯 보이고, [수경주]의 관계사 관련 기록은 실 전체를 바닥 난방법으로 난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믿게 하는데 [수경주]가 기록은 [구당서]보다 앞서지만 난방 형태는 오히려 더 발전된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구당서]는 [수경주]보다 훨씬 뒤에 간행되었지만 [수경주]보다 앞선 시대의 상황을 적고 있다고 상정해 본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들의 발전 과정, 즉 외줄고래에서 점차 고래수와 규모를 넓혀 전면 바닥 난방으로 발전해 가는 순서에는 맞게 된다.
 한편 문헌상으로는 6세기경까지 구들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헌상으로만 구들의 역사를 살필 때의 한계이기도 한다. 손진태 선생이 [온돌고]에서 구들의 발생 시기와 지역을 ‘5세기경의 고구려’로 정리하게 된 것도 이에서 연유한다. 당시에는 고고학이 발전되지 않았을 때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이제는 발굴 유적을 통하여 그 역사는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구들과 유적>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 상황으로 보면 구들(온돌)의 역사는 문헌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역사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구들 유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북한의 세죽리 유적이 있다. 그리고 노남리, 대평리, 토성리 유적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대부분은 ‘ㄱ’자 형태를 취하고 있고, 외줄고래에서 2줄, 3줄 고래로의 고래수 증가가 나타난다.
 이들 유적과 때를 거의 같이하여 남한에도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수원 서둔동의 직선형 구들 고래가 있다. 또한 이들 유적보다 시대적으로 조금 뒤지고 형태적으로는더 초기의 단계인 미사리, 풍납토성 등의 부뚜막들이 있다. 다만 미사리 한양대 발굴팀 구역에서 나온 ‘ㄱ’자형 구들과 서울 구의 동 아차산의 구들들은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기원 전후 세기의 고구려 구들들과 거의 같은 형이라 할 수 있고, 그 외 청원 남성리 고구려형 구들, 부소산성에서의 구들 등도 ‘ㄱ’자형으로 고구려 유적의 규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천 늑도 유적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예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원전 2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라고 있고, 원형 주거의 별체를 따라 구들 고래를 설치하였다는 점이나 집 내부 쪽으로 아궁이 방향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식 구들과 큰 차이가 없다. 얇은 판석을 쓰는 점 등은 구조상으로는 덜 안정적이지만 오히려 고구려 유적에서 흔히 보는 것들보다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조차 한다. 또한 늑도 유적 외에도 인근의 사천 봉계리, 진주 내촌리, 승주 대곡리, 거창 대야리, 김해 부원동, 창원남산, 경주 황성동, 울산 늠네, 포항 호동, 서천 송내리 유적 등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발굴되었다. 이들은 모두 3세기 이전 초기 철기 시대, 어떤 것들은 기원전 세기로 올려 볼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구들은 지금까지 추정되던 것보다 훨씬 이전에 한반도 남쪽 끝에까지 전파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백제 지역에서의 구들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방과 무관하지 않고, 그 백제의 지배층이 북방의 유이민을 모체로 하였다는 점이나, 그리고 고구려와 이웃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문화요소인 구들도 일찍 백제 지역에 전해졌다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반도의 남쪽 끝 사천의 늑도, 그리고 다른 남해안 지역 여러 곳에서 어떤 것은 백제의 건국 시기보다도 앞선 시대에 속하는 구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해상을 통하여 이 지역이 일찍부터 고구려 지역과 교류를 가지고 있었거나 의외로 일단의 고구려 집단이 이곳에 정착하였었는지도 모른다.
 좀더 자세한 것은 최종 발굴 보고서와 앞으로의 연구들을 기다려 봐야 할 것이지만 이 늑도 유적과 남해안 지방에서의 초기 구들 유적들은 구들이 반드시 북한이나 만주 지역에서만 발생하여 한반도 전체에 퍼졌다는 기존의 지배적인 견해를 수정하게 할지도 모른다. 가령 구들이 북부 추운 지역과 별도로 이 곳에서도 동시에 발전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유적의 시기로 보아 그렇게까지 볼 정도는 아니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분명히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 몇 개라도 추가로 발굴되면 기존의 구들의 발전과 전파 경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이러한 엉뚱한 가정을 해 볼 수도 있는 것은 뒤에 살펴보게 될 고대 로마의 하이퍼코스트의 예로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일시적이나마 유럽 북부로 전파된 경우를 보여준다. 물론 늑도등 한반도 남부의 구들 유적들이 워낙 예상 밖의 지역과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발굴한 이들이나 향후의 연구에 관심 있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인 답을 찾아볼 만 한 일이다.
 한편 파주 주월리 유적이나 포천 자작리 유적은 부뚜막 형태 내에서의 진화를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고래, 즉 부뚜막의 연도를 키우며 넓은 폭을 구들장으로 덮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갱도 중앙선을 따라 돌을 받친 것일 테지만 이는 고래가 나누어지고 두줄고래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유적은 고구려의 ‘ㄱ’자형 구들이나 여러 줄의 고래보다 새대는 조금 뒤져보이지만 고구려의 구들도 초기에는 이런 단계를 거쳐 발전한 모습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으며, 미사리나 풍납토성, 그리고 차주 주원리 등에서 보여주는 부뚜막 사례들은 적어도 형태적으로는 북한에서 발견된 고구려 시대의 구들의 전단계, 즉 단순히 강돌을 둘러 주거의 중앙에 만든 원시 시대 노지 다음의 단계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기도 하다.
 문헌과 유적을 종합적으로 보면 구들의 발전은 지금까지 대체로 알려진 것과 큰 차이는 없다. 다만 구들은 그 동안 주로 문헌에 의존하여 유추되던 것이 이제는 않은 유적 발굴은 통하여 보완되어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좀더 확실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헌상으로는 그 시작을 5~6세기까지 추적할 수 있었지만 발굴 유적을 통해 그 역사를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분포 상황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구들의 기원과 전파 과정>
 
문헌과 유적을 합하여 구들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들은 한반도 북부나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일대에서 기원전 3세기 또는 그 이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들은 고구려와 함께 주변 이웃나라로 전화되고 한반도 전역으로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구들의 초기 형태이긴 하지만 기원후 1~3세기에 속하는 것들이 남한의 여러 곳에서도 속속 발굴되고 있고, 특히 남해안 지역에서도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구들은 늦어도 A.D.3세기경까지는 이미 한반도 남쪽 끝에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익산 미륵사지, 문경새재 원터, 강화 선원사지, 관악산 일명사지 등 고려 시대의 유적들은 구들이 고려 시대에는 전면 바닥 난방으로 전환되어 있음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발해 상경 용천부나 청해토성 등에서의 여러 줄 고래 유적은 그에 이르는 중간 단계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구들과 캉의 관계>
 
중국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실의 일부분을 구들로 하고 있는 캉은 고구려의 구들이 만주 일대에서 계속 사용되면서 구들의 초기 단계에서 중국 주거 문화에 접목되어 계속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기록상으로 금나라 때부터 캉에 대한 기록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다 북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금나라 사람들이 정복 왕조로서 중원 일대까지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은 북만주 인대에서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세웠고, 이 지역도 옛 고구려 땅에 속하므로 금나라 사람들은 금나라 건국 이전에도 고구려, 발해 등으로부터 다른 문화 요소와 함께 구들을 그대로 이어받아 써오다가 중원을 정복하면서 북경 쪽으로도 전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캉이라 불러더라도 ‘캉’은 구들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하고 구들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한편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탁상식 구들이나 하동 칠불암의 아자방도 높낮이를 달리하여 단을 이룬다는 점에서 캉과 같고, 시장 통의 포목점이나 오늘날의 일반 대중 식당에서도 유사한 응용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으므로 공간의 일부를 높여 바닥 난방을 하는 캉과 같은 것은 우리 문화 속에서도 일반적인 전면 구들과 함께 늘 존속되어 온 구들의 한 형태라고 하여야 할것이다.

<구들의 명칭>
 
구들은 곳 온돌이고 온돌은 곳 구들이다. 구들은 본래부터 ‘구들’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믿게 하며, 한글이 창제된 이후부터는 기록으로도 나타난다. 현존하는 문헌 중에서 ‘구들’이란 우리말 이름이 등장하는 최최의 기록은 1489년에 간행된 [구급간이방언해]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번역박통사](1517), [구황촬요](1660) 등 다른 문헌에서 ‘구들’이란 이름들이 증가하며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한글이 없던 시대에는 물론,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구들은 기록에서 한자로 많이 기록되었는데 ‘  (갱)’, ‘  (돌)’, ‘  (돌)’, ‘  (돌)’, ‘  (난돌)’, ‘  (난돌)’, ‘  (난돌)’, ‘  (난돌)’, ‘  (난돌)’, ‘  (온돌)’, ‘  (온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구들이 ‘온방’이나 ‘방돌’로 표현되기도 하였고, 따듯한 방이라는 의미인 ‘욱실’이라고도 불리다가 점차 ‘온돌’과 ‘온돌’로 정착되어 왔다.
 불을 때지 않아 구들이 찰 때는 ‘빙돌’이라 하기도 하였고, 다 같은 뜻으로 쓰였지만 ‘온방난돌’과 같이 구들로 따듯해지는 공간과 따듯한 구들 시설 자체를 염두에 두는 표현들도 보인다.
 그러나 한글 창제 이후 이러한 이름들을 한글로 옮길 때는 모두 ‘구들’로 옮기고 있으므로 (‘구돌’이라 한 기록도 있음) 한자로는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일상에서는 들 ‘구들’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는 ‘온돌’이란 형태로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청파극담](1494년대)이다.
 [삼국유사]의 왕흥사 이야기와 함께 등장히는 ‘돌석’은 오늘날의 구들돌, 구들장의 한자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용천담적기](1515년경)의 ‘돌유전’은 당시의 장판지의 존재를 알려주는 첫 기록이 될 것이다
 한편 중국 지역에서 사용되는 구들 또는 그와 유사한 시설을 중국 기록들은 주로 ‘항’, ‘토항’,  등으로 기록하여 왔고, ‘캉’또는 ‘투캉’으로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다. 때때로는 ‘土床’ 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들 역시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모두 ‘구들’또는 ‘흙구들’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은 중국의 ‘캉’도 구들로 인식하였다.

<구들(온돌)의 형태적 변모>
 
형태적으로 보면 구들은 집 한 가운데의 노지에서 부뚜막형으로, 그리고 부뚜막을 더 연장하여 직선형 구들(고래)로, 그리고 ‘ㄱ’자형 구들로, 그 다음에는 열 줄의 구들로, 그리고는 드디어 실 또는 방 전체를 구들로 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왔고, 또 방 한칸을 구들로 난방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방 단위로 난방 면적을 늘리는 형태로 발전하여 왔다.
 또 땔감, 즉 연료나 에너지원에 따라 구들의 구조 방식도 바뀌어 나무+연기+고래, 연탄+연탄가스(연기)+고래, 연탄+보일러+온수 파이프, 오일 또는 가스+보일러+온수 파이프 방식으로 발전하여 왔다. 최근에는 전기(전열선) 또는 온수+히트 파이프. 전기+탄소필름 등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새대 교체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우리 민족은 구들을 발명한 이래 한 번도 구들을 떠나 본 일이 없다. 연료가 바뀌고 예전 모습의 고래가 사라지기도 하였지만 방바닥을 따듯하게 하는 근본 원리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구들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그러므로 구들 이야기도 쉽게 끝을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전통 구들 시대 이후 구들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잠시 살펴보고 최근의 신기술 개발 동향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구들은 그것이 생겨난 이래 1920년대까지 주로 나무를 땔감으로 하였다. 그리고 도시화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60년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농가는 나무를 땔감으로 하였다. 온화한 계절에는 솔가리(강원도 : 소갈비)를 긁어모아 두었다가 땔감으로 쓰기도 하고 그 외에 볏짚이나 탈곡하고 버려지는 콩나무 줄기, 콩깍지 등도 사용되었지만 주 연료는 역시 나무였다. 소나무나 참나무 장작으로 으뜸이었고, 그 외에도 나뭇가지나 잡목으로 나뭇단을 만들어 함께 쓰기도 하였다. 집집마다 겨우 내내 쓸 땔감은 준비하는 일은 김장하는 것과 함께 중요한 월동 준비에 속했다.
 그러던 것이 인구가 늘어나며 나무도 땔감으로 구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무하러 점점 멀리 깊은 산을 가야 했고, 점점 높이 올라가야 했다. 도시로의 반입도 어려워졌거니와 연기 등은 도시 생활의 땔감으로 점점 맞지 않게 되었다. 서울의 경우 독립문 밖 영천 고개에는 서북 지역에서 들어오는 나무 장사가, 그리고 동대문에는 동북 지역에서 들어오는 나무 장사가 1920년대까지만 해도 줄을 이었었다. 산은 헐벗고 땔감은 부족하여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새로운 연료로 떠오른 것이 연탄이었다.

<연탄 구들(온돌)시대>

 연탄은 1920년대 처음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처음에는 벽돌만한 크기에 구멍이 2개 뚫린 2공탄이었다. 구멍이 9개인 구공탄은 1927년께 나타났는데 화로에 묻고 재로 둘러싸 보약을 달이거나 인두를 달구는 데 주로 썼지 난방용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는 송편처럼 빚은 조개탄이 보급되기도 했다.
 1953년 한국 동란이 끝나면서 국산 무연탄을 원료로 구공탄을 제조해 공급되었는데그것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형태의 연탄이며 대략 1957년께는 서울 시민 90% 가까이가 연탄을 가정용 연료로 사용하게 된다.
 60년대에는 도시 인구 증가와 함께 연탄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 한창 성수기에는 석탄 생산이 연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된다. 이때 철도역 주변이나 동네 공터마다 연탄 공장이 우후죽순처럼생겨나 서울 시내에만 1백여 개가 성업했다. 이때는 가루 석탄을 가져와 구멍 뚫린 형틀에 넣고 해머로 두드려 연탄을 찍어내는 가내 수공업적 형태였다. 이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발로 밟는 프레스가 나오고 70년께는 국내 최초로 동력 윤전기를 장착한 단탄기가 등장하여 1시간에 800여 장을 찍어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가정용으로 19공탄과 23, 31공탄, 업소용으로 41,42,49공탄 등이 공급되기도 했으나 요즘은 22공탄으로 통일되었따
 1960년대 말까지 도시 지역에서는 거의 연탄이 연료가 되었다. 그러나 시골이나 산골에서는 70년대에도 여전히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땔감이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구들도 변화하였다. 난방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고래의 크기는 축소되고 아궁이도 연탄에 맞추어 개조되었다. 나무를 연료로 할 때에는 한 아궁이로 보통 방 두 개를 덥혔는데 연탄 시대가 된 이후로는 대개 아궁이 하나에 방 하나를 난방 해야 만족스러울 만큼 따듯했다. 방마다 아궁이를 두어야 했고 불을 가는 (연탄을 갈아주는)일이며 불기를 조절하는 일이나 재를 버리는 일이 그만큼 늘어났다.
 연탄 아궁이의 원리 자체는 구들의 역사에서 또 한번의 발전이다. 그러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항상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연탄불 살펴보는 일은 많은 가정에서 서로 미루는 일이기도 했고, 한번 꺼뜨리면 다시 불을 붙이기가 간단하지 않았다. 하숙집 같은 곳에서는 좀더 따듯하게 자려고 주인 몰래 불구멍을 더 열었다 야단맞는 하숙생도 흔했고, 다른 방 연탄불 몰래 빼내오는 얌체들도 있었다.
 전에는 월동 준비에 나무 몇 단, 장작 몇 평하던 것이 연탄 100장 200장 들여 놓아야 사람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날품팔이 영세민들은 연탄이 떨어지면 옆집에서 몇 장씩 꾸어 쓰기도 하고 매일의 수입에서 한두 장씩 사들고 지친 걸음걸이로 언덕길을 올랐다. 연탄을 낱장으로 사갈 때는 새끼줄에 매듭을 지어 연탄 가운데 구멍에 끼어서 들도록 하였는데 돌이켜보면 그것 또한 매우 적절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연탄 온돌 시대가 되면서 또 다른 큰 문제가 생겨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탄가스 중독에 의한 사고였다. 연탄은 연기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러나 인체에 유해한 가스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찢어진 문구멍이나 금간 방바닥을 통해 스며들어 잠든 사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 새대의 신문에는 연탄가스 사고에 대한 인명 피해 뉴스가 특히 겨울이면 단골 뉴스였고, 연탄가스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때로는 자살 수단이 되기도 했다.
 두 장의 연탄을 위아래로 얹어놓고 다 타버린 밑의 것은 버리고 불이 타고 있는 위의 것을 밑으로 내린 다음 새것을 위해 얹어서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게 하는, 그리고 연탄 한 장만으로는 무의미하고 석 장을 쓰면 오히려 비효과적이어서 두 장을 써야 하는 이 시스템은 일면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고 할 만한다. 그러나 방마다 아궁이를 두어야 한다든지 때에 따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구들의 긴 역사에서 오히려 퇴보한때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응하여 등장한 것이 연탄 보일러이다. 연탄의 화기가 직접 방을 데우고 취사에 쓰인 것이 아니라 물을 가열하여 파이프를 통해 순환시키는 방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는 옛집과 함께 고래와 나무를 때는 아궁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래의 고래 위에 온수 파이프를 깔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연탄 보일러로는 난방만을 해결하고, 취사에는 석유 난로나 별도의 연탄 화덕을 쓰기도 했다.
 연탄 보일러 시스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통 구들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첫째는 고래라는 방 밑의 빈 공간이 사라지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들, 즉 온돌이 생겨난 이래 늘 당연시 되어오던 취사와 난방 기능이 분리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연탄 보일러 시스템은 연탄 아궁이만큼 일반적으로 퍼지지는 못했다.
 1950년대부터는 한국에도 아파트란 주거 형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주거 형식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바닥을 따듯하게 하는 구들, 즉 온돌방은 모두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여러 층으로 구성되는 아파트에서도 연탄 온돌을 설치하였는데 고래를 속이빈 블록 형태로 만들어 별돌 위에 연결하여 얹고, 구들장도 콘크리트 규격판으로 제작하여 얹었다. 그런데 연탄 아궁이에서도 아궁기는 고래보다 낮게 있어야 하므로 이때의 아파트는 모두 밑의 집 천정으로 튀어나가는 함실 아궁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서양의 아파트에서와 같이 간단히 슬래브를 칠 수 없었고 함실 개수만큼 들쑥날쑥 하는 거푸집을 쓰며 좀더 복잡한 시공이 되었다.
 프로판 가스가 수입되어 공급되면서 취사와 난방의 분리는 점점 가속화 되었다. 석유의 수입이 늘어나고 난방은 오일 보일러와 연결하여 방바닥에 온수 파이프를 까는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다.

<온수 보일러 시스템>

 197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새로 짓는 집에 오일 보일러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오일 보일러는 온수를 매체로 하므로 연탄 가스 중독의 위험으로부터도 점차 해방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연탄 가스 중독사에 대한 기사도 신문지상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안방 정도는 온수 파이프를 깔아 온돌방을 만들고 나머지 방들은 라디에이터를 설치하여 양식 저실로 많이 만들었다. 또 많은 집에서는 옛날집 대청처럼 거실에 아예 난방을 하지않았고 거실이 너무 추우면 몇 달 동안 석유 난로를 사용하였다.
 각 시대마다의 난방 및 취사 방법은 그때마다의 가정 형편과 국가 경제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변하는 것이지만 보일러식 난방 방법은 몇 번의 ‘오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점차 일반 가정의 난방법으로 확산되었고 요즈음은 웬만한 시골 가정에서도 채용되어 한국의 대표적인 난방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시스템 내에서도 몇가지 진화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쇠 파이프로 바뀌고, 동 파이프에서 지금은 합성 수지 계통의 파이프로 바뀌었다. ‘엑셀’파이프는 온돌용 파이프의 대명사가 되어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상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보일러의 성능도 많이 개선되었고, 취사에 쓰는 가스도 도시에서는 LPG가스 (부탄과 프로판가스)와 LNG가스 (대부분지역의 도시 가스)로 대체되었다. 또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는 개별 보일러실이 사라지고 열병합발전소에서 온수를 공급받는 지역 난방이 많이 확대되고 있다.

<구들(온돌) 관련 신기술 동향>

 오늘날 대부분의 집들에서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바닥 난방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있고 새로운 개념의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된 온돌, 다시 말하면 구들의 가장 최근의 모습이기도 하며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근대 또는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몇 가지 신기술을 소개하고 기록해 두는 것도 이 책의 목적에 포함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 기업이나 상품 선전의 장이 되어서도 안 되고 창안자의 노하우를 유출해도 안 될 일이므로 건축박람회등에 제공되는 제품 설명서와 같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기본원리 정도만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닥 난방 기술의 종주국으로서 앞으로의 후속 연구를 자극하는 일이 될 것이며, 구들 전통을 이어 우리의 기술이 첨단 기술로 거듭나고 세계를 상대로 경쟁력 있는 수출 상품으로 발전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C모씨는 일찍이 군복무 시절부터 우리 구들의 우수성에 대해 심취한 나머지 이후 수십 년 동안 구들을 연구하여 ‘겹구들’이란 것을 개발하였고 국제 특허를 내고 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겹구들’은 전통 구들의 원리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방바닥에 옛 고래에 해당하는 공동 공간을 위아래에 이중으로 두고 있어 ‘겹구들’이라 이름을 붙인 것인데 아래 공동층 바닥에 전기발열 장치(씨즈히터)를 일정 간격으로 설피하여 이것이 공동층 내부의 공기를 데우고 그 위층의 공동층 내부의 공기와 이를 덮고 있는 바닥재를 데우는 원리이다.
 비록 전기가 에너지원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쓰는 전기는 산업체에서 전기를 적게 쓰는 야간 시간대의 전기(심야 전기라 함)을 활용하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고, ‘고래’와 바닥 전체가 열을 오래 저장하여 가정에서 필요한 시간대에 오랫동안 열을 방출하여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므로 오일 보일러를 가동하는 것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난방을 할 수 있으며, 남아서 버려지는 야간의 전기를 의미 있게 활용하여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된다는 점이 ‘겹구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기로 최초 가열을 하긴 하지만 전기는 공기를 가열하고 데워진 공기가 방바닥을 따듯하게 하는 원리이므로 근래 사람들이 많이 우려하는 전자파 발생 같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대단위 아파트, 같은 대는 아직 활발히 도입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제품의 성능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충분하지 못한 믿음, 그리고 사회 구조와 신기술의 유통 구조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신 개념은 온수 파이프 대신 ‘히트 파이프(heat pipe)’란 것을 사용하여 방바닥을 따듯하게 하는 것이다. 이 히트 파이프는 별도의 전기 히터나 온수 파이프에 접속되어 열을 공급받는다. 이 ‘히트 파이프’는 열전도율이 매우 높은 구리관으로 되어있는데 그 내부에 초전도 열매체를 넣고 완전 진공 상태로 만들어 한쪽 끝에 열을 가하면 순식간에 관 전체로 열이 퍼져 관을 덮고 있는 바닥재가 따듯하게 되고, 이어서 방안의 공기가 따듯하게 되는 원리이다.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열전도율이 아주 높은 파이프를 써서 방바닥에 전선을 직접 깔거나 파이프 속에 물이 필요 없게 한 데 있다. 그러므로 방바닥 전체에 온수 파이프를 까는 것에 비하여 건물 자체에 무게를 줄일 수 있고, 부식 등으로 파이프가 막히거나 얼어터지는 일이 없으므로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밑에 집에 피해를 줄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패널 유니트화 하여 건식 조립공법으로 대부분의 공정이 이루어지므로 계절에 관계없이 쉽게 시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고 간단히 필요한 곳만 쉽게 난방을 가동할 수 있는 등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과 또 다른 방법의 하나는 탄소와 토르말린, 게르마늄, 은 등으로 코팅하여 발열면을 필름 형태로 만들 것으로, 전기에 의해 작동하는 방식이 있다.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난방의 경우만 보면 보일러실이 필요 없고, 둘을 쓰지 않으며, 좀 간단히 말하면 벽지 바르듯 하는 비교적 쉽게 시공하는 방식이다. 방바닥은 보온, 소음 방지 등의 다른 기능 때문에 어느 정도의 두께를 갖게 되는 것이지만 이 방식은 바닥의 두께를 대폭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국내에서는 이들 외에도 여러 제품들이 나오고 있고, 외국에서도 바닥 난방 기술 연구가 활발하다.
 독일의 경우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밴드에 가깝게 얇게 만든 온수 패널 바닥 난방 시스템이 선보였고, 심지어 대형 사무실의 이중 바닥(Access floor) 구조에서도 바닥 난방법으로 난방을 가능하게 하는 제품들이 시장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아직 온수 파이프 시스템을 대체할 정도로 일반화 되지는 않았으나 연탄 아궁이가 전통 구들을 대체하고, 온수 보일러와 온수 파이프 시스템이 연탄 시대를 후퇴시켰듯이 이들 기술 중 어떤 방식이, 또는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기술 중의 하나가 오늘날의 온수 파이프 형식을 밀어내고 다음 세대의 범용적 기술로 자리 잡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의 바닥 난방 기술 개발에서는 경량화와 시공의 용이성, 방별 또는 부위별 제어 용이성, 바닥 두께를 줄이면서도 방음 효과를 우수하게 하는 것, 시공의 간편성 등이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아울러 냉난방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해결하는 방안이라든가 주거용은 물론, 사무 자동화(Office  Automation), 빌딩 지능화(Intelligent Building) 등 때문에 이중 바닥이 불가피한 오피스빌딩에서도 채용 가능한 시스템 개발에 관심을 기울려야 할 것이며, 이 새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개념도 이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거용만을 염두에 둘 떄보다 엄청난 시장을 의미하며 세계를 대상으로 할떄 무한한 사업성을 내포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앞서가는 IT 기술을 잘 활용한다면 가장 한국적인 기술을 가장 세계적인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방이나 공간의 바닥을 따듯하게 하는 것이면 그것을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구들(온돌)이 계속 변모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은 온돌이며 구들이고, 온돌방이며 구들방이다. 비록 연기로 따듯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불로 밥을 짓지는 못하더라도, 그리고 고래란 요속 없어졌다 하더라도…….

<선교장의 새 구들>

 이 책의 교정을 보고 있던 중에 강릉 선교장이 수리중이고 구들도 새로 놓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아제는 전통 구들 놓는 것도 보기드문 일이 되었으므로 바쁘더라도 한번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보고나니 이 책에 포함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전통 구들 시공 사례로는 아마 가장 최근의 사례가 될 것이고, 사진이 선명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사지만 보고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행랑채에 고래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돌로 심을 박고 진흙으로 싸 발라 고래둑을 만들었는데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몇 년 전 고래 속의 연기 행태 실험을 위해 다른 ‘구들장이’가 놓은 충북 영동에서의 고래와 좋은 비교가 되었다.
 이곳 선교장의 ‘구들장이’는 70대 중반의 할아버지로 강룽 저동(경포대 지역)에 사는 박영국 씨라 했다. 그리고 이 일대의 구들은 대개 그가 놓았다고 했다. 그가 놓은 구들은 대부분 아궁이 하나로 방 2칸에 불을 때는 것이었지만 아궁이 하나에 방 3칸을 연결하는 구들도 가끔 놓아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들은 보통 한 15년 쓰고 새로 놓는다고 했다. 이런 점들은 필자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당에는 원래의 구들에서 들어낸 구들장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 구들장들은 새것을 보태서 대부분 다시 쓸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은 지 오래 된 집에서의 구들장은 나이가 얼마나 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집은 헐리고 불에 타 없어져도 구들장은 쓰고 또 쓰이기 때문이다.
 ‘구들장이’들은 우리의 문화를 담는 큰 ‘그릇’을 만들어 온 장인이다. 그렇지만 정말 경험과 능력을 지닌 ‘구들장이’를 만나는 것은 요즈음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장인들은 인간문화재,전통기능보유자 등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기도 하는데 어쩐 일인지 ‘구들장이’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라도 더 기록해 두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적어둔다.

<캉의 기원>

 중국이 개방되고 여행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캉’이라 불리는 난방 시설을 보고 그것이 우리의 구들과 비슷하여 흥미로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구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므로 우리의 온돌, 즉 구들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기도 한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문화 요소 중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들이 적지 않고, 온돌의 역사를 다룬 학자들 중에도 구들(온돌)과 캉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짚어주지 않고 "온돌은 만주 지방에서 널리 쓰이는 ‘캉’과 흡사"하다는 정도로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캉’은 오늘날 우리말에서는‘항’으로 읽히기 때문에 우리가 문헌편에서 주로 ‘항’으로 지칭하며 사려보았던 그것이다. 그리고 ‘캉’은 보았듯이 약 11세기까지 볼래의 중국 문화, 즉 만주를 포함하지 않은 북경 지역과 그 이남 지역에는 그런 난방법이 없었던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고, 북만주에서 일어나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장악한 금나라 떄부터 캉에 대한 언급이 잦아지므로, 금나라 사람들이 캉을 북경을 비롯한 중원 일대에 보급한 것이 분명해진다. 금나라는 고구려 고토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1115년 건국되었으므로 고구려의 구들을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키며 써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캉은 결국 고구려의 구들에서 발전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고구려 또는 고조선 후기에 등장한 구들이 만주 지역에서는 발해, 한반도에서는 고려 등에 계승되었고, 금나라를 일으킨 여진족들에게도 계승되어 계속 발전시키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만 금나라가 들어서기 까지 만주지역은 아직 중국에 속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므로 캉과 구들(온돌)은 조상이 같다고 하여야 하고, ‘오늘날의 중국’땅에 남아 있는 구들로 보면 문헌이나 유적으로 파악되는 상황과도 맞고, 발전 형태로도 수긍이 가며 무리가 없다.

<캉의 분포>

 오늘날 중국의 캉은 만주 일대는 물론, 황하에서도 한참 남쪽으로 내려온 지역에까지 퍼져있고, 정주화된 몽골인들의 텐트 주거인 ‘게르(중국에서는 ‘빠오’ : 包라 한다)’ 속 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면적으로 보면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는 셈이다.
 구들과 캉은 원리상 차이가 없다. 그리고 대개 취사를 겸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구들(온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달리 보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중국 및 만주의 캉들은 방 하나의 일부문을 좀 높게 ‘캉’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그냥 다진 바닥이 되거나 전을 깐 바닥이 된다. 이것은 실 하나의 바닥이 전부 난방 되는 구들방(온돌방)과 외관상 다르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부엌과 첫 방 사이의 벽을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이를 ‘정지방’이라 한다. 또 정지방 형식은 맞 연변 지역의 조선족 가옥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중국 족의 조선족 주거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함경도나 연변 지방은 너무 추운 나머지 부엌도 난방이 되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엌과 첫 방의 벽을 터서 통합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방바닥의 열기를 받아 부엌도 지낼 수 있을 만큼 훈훈하게 한 형태이다. 그런데 중국의 캉은 방 하나의 일부를 난방한다는 점에서 이들 정지방 형식과도 좀 다르다. 그렇지만 캉 역시 만주와 같은 추운 지역에서 쓰기에, 그리고 하나의 공간 내에서 침식하고 생활하기에 유리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며, 고구려 시대 초기 구들 형태에 가깝다.

<캉의 종류>

 캉의 종류는 구들을 설피한 정도에 따라 일면캉, 이면캉, 삼면캉으로 구분되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는 문헌편에서 보았듯이 금나라 시대에도 있었던 형식이다.
 중국에서는 항을 만들 때 한국에서처럼 청석, 화강석 등을 쓰지 않고 연와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거은 적절한 석재가 풍부하지 않은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경 아시안 게임(1990년)을 앞두고 그에 쓸 선수촌 공사를 한국의 모 건설 회사가 수주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의 아파트에서의 온돌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전면 바닥 난방으로 공사를 하기로 하였다는 기사의 내용이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근래에는 중국에서도 잘사는 사람들은 점차 한국에서와 같이 바닥 전면을 난방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 ‘캉’의 모습이 우리의 방식으로 비뀌어 가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된다. 그것도 또 하나의 한류로 발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헌과 유적을 통해 구들, 한자로는 온돌이라고 하는 우리의 전통 바닥 난방법의 역사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았고, 구들과 뿌리를 같이하는 중국의 캉, 구들과 원리가 비슷한 서양의 하이퍼코스트, 그리고 하이퍼코스트 이외의 서양에서의 일반적인 여러 가지 난방 방법들의 발전 과정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특히 서양의 일상적인 난방 방법도 구들과 함께 살펴본 것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는 비교의 바탕을 갖게 되고, 구들이 갖는 특징과 우수성들을 더욱 쉽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구들 이야기, 온돌 이야기’가 매우 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구들 이야기의 절반 정도만 다르어졌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구들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면서 우리 주거 문화의 바탕이 되고, 그 영향은 우리의 집의 구조와 생활 속 구석구석에 스며 있어서 그런 점들을 살피지 않고는 구들의 의미를 충분히 팍악했다고 할 수 없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거의 다를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야기가 한참 더 계속되어야 할 것이나 그 양이 또 상당할 것으로 짐작되므로 ‘생활 속의 구들 이야기'는 훗날 별돌의 책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지금까지 이야기 된 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구들의 우수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한다.
 구들의 발전 과정, 그리고 그 구조 및 작용 원리를 살펴보면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얼마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물려받았는가를 알게 된다. 그 우수성은 특히 서양에서의 주거 문화와 그들의 난방 방법의 발전 과정을 개관하고 비교해서 볼 때 더욱 돋보인다. 그리고 많은 특징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특히 쓰기 좋아하는 ‘세계 최초, 최고, 가장’ 등의 접두어를 과장 없이 붙여도 좋은 것들이다.

-구들은 인류 최초의 바닥 난방
 구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바닥 난방법으로서 인류 역사상 최초이다.
 구들과 비슷한, 그리고 원리상으로는 같은 로마시대의 하이퍼코스트(Hypocaustum : Hypocaust)가 있으나 주로 공중욕장(Thermae)의 난방으로 사용되었으며, 4세기경 로마의 멸망과 함께 잊혀진 난방법이 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 재발굴되어 서양의 현대 바닥 난방의 기초가 되긴 하였지만 서양에서는 오늘날까지 누구나 쓰는 난방 방법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구들은 인류 최초의 연기 없는 난방법
 전통 구들은 바닥 난방으로서 세계 최초이기도 하지만 또한 연기 없이 불을 쓰게 된 최초의 난방 방법이다.
 서양의 경우 10세기경까지는 모닥불의 형태로 취사와 난방을 하였다. 우리가 무드 있게 보는 벽난로도 약 10세기경부터 등장하였는데 모닥불 형태이든 벽난로의 형태이든 그런 난방법에서는 힘들게 얻은 열기가 대부분 굴뚝이나 깔때기형으로 되어 있는 지붕의 연기 속에 시달려야 했으며, 연기를 내쫓으려면 대부분의 열기도 모두 사라지고, 열기를 집 안에 붙들어 두려 하면 연기에 시달려야만 했다. 연기는 열기와 오랫동안 불가분의 것이었고 열을 취함에 있어서 필요악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난방 방법들은 난방 효과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얼굴은 ‘불고기’가 되어도 등은 항상 시리고,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라도 무릎 이하는 항상 시리게 된다. 실제로 중세 깊숙이까지는 연기로 인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서양의 집에서는 연기가 그냥 집 안에 두기는 고통스러운, 그렇지만 내쫓을 수도 없는 악동이었다면, 우리조상들은 구들이란 것을 발명하면서부터 바로 그 약동을 충실한 충복으로 지배했으며, 바로 그 연기를 없어서는 안 될 난방의 본질로 만들었던 것이다. 구들은 불에서 연기는 배제시키고 열기만을 획득하는, 즉 필터링(filtering)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였으며, 연기가 방밑을 기어서 지나가는 형상이다 사람이 궁둥이 밑에 깔고 앉는 형상은 불을 말 그대로 지배하고, 길들이고 복종시켰던 형상이어서 흥미롭다.

-구들은 최초의 축열 난방
 에너지를 저장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계획 경제의 기반이지만 오랫동안 풀이 어려운 난제였다. 예를 들면 벽난로나 모닥불에서는 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따듯할 수 있으나 불이 꺼지고 나면 곧 열기도 사라진다. 그러나 구들 난방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이 구들장에 저장되어 장시간 방을 따듯하게 해주고 방이 식을 때가 되면 다시 취사를 하면서 구들장이 다시 가열되고 열을 저장하는 것이다. 또한 서양이 벽난로는 불이 타고 있는 동안에 한정된 일시 난방 방식이라면 우리의 구들은 지속 난방법인 것이다.

-구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중앙 난방식
 서양에서 집을 빌려주는 광고를 낼 때는 흔히 난방 방식이 중앙난방식이라는 것을 표시했었다. 그것은 벽난로와 같이 방마다 관리를 요하는 개별 난방 방식이 아닌 편리한 현대 시설로 난방 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집세도 비싸게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중앙 난방식의 핵심은 보일러와 라디에이터를 통하여 한 곳에서 불을 때서 여러방을 데우는 것인데 구들은 이미 한 아궁이의 불로 두 칸, 심지어 세 칸의 방까지 데우고 있었으니 비록 오늘날의 중앙 난방식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이 중앙 난방을 실현했던 것이다.

-구들은 난방과 취사 기능을 지혜롭게 결합
 우리의 구들은 기본적으로 취사와 난방을 겸했다. 물론 아궁이만 있어서 난방만을 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부뚜막을 두고 취사를 함과 동시에 잉여 열기를 활용하여 난방까지 되게 하는 것이 구들의 또 하나의 우수성이다. 앞에서 언급한 로마 시대의 하이퍼코스트 방신에서는 취사를 겸한 예는 없었고, 모닥불 형식이나 벽난로 형태에서도 취사가 겸해지기는 하였으나 우리의 구들에서와 같이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동시에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구들은 가장 이상적인 실내 온도 형성
 구들은 바닥 난방이다. 그리고 모든 바닥 난방은 실내 온도 형성 측면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보여주는 난방 방식으로 연구에서 판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벽난로나 현대의 라디에이터 난방은 하체 부위에서는 차고 화기에 면하지 않는 부분이 늘 춥게 마련이지만 바닥 난방은 그런 것이 없다. 특히 바닥에서 부터 열기가 상승하므로 바닥과 바닥 근처의 온도는 몇 도 더 높아 서양의 난방 방법의 고질적 문제인 인간의 하체 부위가 시리지 않아 정상인은 물론 노약자들에게도 가장 바람직한 거으로 증명되고 있다.

-구들은 자연 법칙에 가장 충실한 난방법
 찬 공기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고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도 아는 자연 현상이다. 자연 현상을 무시하면 항상 무리가 따를고 추가적인 해법이 있어야 한다. 구들은 이 자연 법칙을 그대로 이용하여 공기 순환을 이루는 대류 방식으로 되어 있고 고른 실내 온도 분포를 이루는 원리의 하나이기도 하다. 벽난로나 라디에이터 난방에서 무릎에 시린 것도 결국은 이 자연 법칙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들은 난방 성능이 가장 뛰어난 방법
 난방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뭐니 뭐니 해도 방을 충분히 따듯하게 해서 인간이 춥지 않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구들이 세계 최초의 영예가 많다 하더라도 충분이 따듯하게 하니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구들(온돌)은 이상적인 실내 온도만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매 발전 형태마다 그 시대의 난방 방법 중에서 가장 난방 성능이 뛰어난 난방 방법이었다. 물론 성능에는 경제성 등 여러 요인이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만 서양의 난방 방법들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충분히 열기를 생산하여 주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불을 많이, 그리고 오래 땐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불을 오래 때도 난로 곁을 떠나면 춥고, 불이 꺼지면 춥고, 난로 곁에 있어도 등과 무릎 아래는 써늘하여 몸을 돌려가며 불을 쬐어야 하였다.
 독일에서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서 공작의 부인이 된 리제로떼(Liselotte)는 1695년 2월 3일 에 고향으로 쓰는 편지에 "왕의 식탁에서도 물과 와인이 얼었다."라고 적고 있고 1701년에는 "오리털이불 같은 것은 내 평생 들어보지 못했고 나를 따듯하게 해주는 것은 침대에 데리고 자는 작은 개 여섯 마리"라고 쓰고 있다. 벽난로도 있고 땔감이 부족한 것도 아닌 왕가에서도 충분히 따듯하게 지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선교사로 1889년 한국에 와있었던 게일(J.S.Gale)목사는 1896년까지 전국을 돌며 경험한 것을 적은 ‘코리언 스케치(Korean Sketches)’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조선의 자그마한 오두막에서 자는 것이 내가 견디기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중략… 거의 살이 데일 정도까지 뜨거워지는 방바닥에(the Floor heated nearly to the frying point)요를 까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는 악몽(firey dreams)에 시달리고 벌겋게 구워져 숨을 헐떡이며 아침이 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두 해 인숙해지면 그 뜨거운 방바다을 좋아하게 되고 이곳 사람들이 말하듯이 추운 날 여행 후에 쉬기에 썩 좋다."
 그는 여러 곳에서 구들을 ‘후라이 팬 플러어(Frying pan floor)’에 비유하기도 하고 평균33°C, 때떄로 39°C까지 올라가는 방바닥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해 고생한 것을 적고 있다. 너무 뜨거워 쾌적하지 못한 것도 문제이긴 하겠지만 손님을 맞으면 평소보다 불을 많이 때주는 것이 우리의 넉넉한 인심이고 예의였던 탓도 있는듯하다. 그러나 서양의 난방법들과 달리 난방이 충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과열되어서 문제인 것이고 온도를 낮추는 것은 문제도 아니므로 이 기록은 구들의 성능을 오히려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구들은 한민족 문화의 바탕
 구들의 우수성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전통 구들에서의 많은 부분의 신비는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도 됮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구들을 잘 이해하면 한국의 주거 문화의 여러 특징들을 한꺼번에 많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낳은 문화 요소는 구들이 생겨난 이후에 발전된 것이며 구들은 말 그대로 우리 문화의 바탕이며 삶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 문화체육부에서는 한국 문화의 상징물 10가지를 선정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한복, 김치, 태권도 등 여러 가지가 선정되었지만 구들은 후보에도 끼지 못했따. 구들은 상징화하기가 어려워 그런 것이 아니냐고 모 신문사 기자는 말했다. 하기야 구들은 보이지 않는 난방이니 그럴 법도 핟. 또한 외국인들에게 설문을 돌려 선정했다고도 했는데 구들에서 살아보지 않은 그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구들의 성능과 정취를 알리 만무하다.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가옥이 현대적으로 다시 지어지고, 고층아파트가 도시를 메우면서, 아름답다는 지붕의 처마 곡선도, 정취있는 장독대도, 마당도, 대청도 보기 드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구들만은 오들날에도 고층 아파트 속에서도 단독 주택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비록 아궁이는 보일러로, 고래는 온수 파이프로 바뀌고 구들이란 이름도, 그 세부 명칭도, 대대로 노하우를 물려받은 장인들도 함꼐 사라져 가지만 구들의 원리는 민족의 숨결처럼 우리 문화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구들은 가장 한국적인 특징, 가장 세계적인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수하므로…….


<불 옆에 솥을 놓고 끓기를 바라는 사람들>
 자연에서 불을 피우면 불'샓� 위로 향한다. 바람이 불면 불'샓� 잠시 바람 부는 방향으로 쓰러지지만 바람이 없어지면 이내 힘을 되찾아 수직으로 타오른다. 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연기, 그리고 열기도 마찬가지다. 밑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밥을 할 때 불 위에 솥을 얹지 불 옆에다 솥을 얹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런데 밥을 하려면서 솥을 불 위에 뒤 않고 불 옆에 두거나, 심지어 불 밑에 두고 밥이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문명과 격리된 원시 부족이라도 불을 그렇게 쓰는 것은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있다. 바로 서양 문화에서의 난방법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렇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에서의 난방 방법은 원시 시내의 모닥불에서 벽난로, 카헬오펜(타일 벽난로), 철제 난로, 라디에이터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람의 옆에 서 있는 불인 셈이다. 열기는 자연 조건하에서는 항상 위로 올라가는 것이므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것보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사용하는 공가의 아래쪽을 따듯하게 하기보다 사람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따라서 따듯할 필요사 없는 방의 상부와 천장 쪽으로 몰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솥은 아니지만 원리상으로 볼 때 솥을 불 옆에 두고 음식이 빨리 끓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경우가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벽난로나 타일을 붙인 카헬오펜, 또는 철제 난로 밑을 떌감을 둘 장소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난로는 흔히 방바닥보다 한 단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청소 등의 문제 때문에 라디에이터도 방바닥에서 10cm 정도 띄어서 설치한다. 열기를 효과적으로 취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가능한 사람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서양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람이 불보다 더 밑에 있는 셈이다. 솥을 불 옆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불 아래에 두고 취사를 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닥불과 같은 형태로 불을 쓸 때는 사람으로 불고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이 불 위에 있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님들이 입적하여 다비식을 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사람을 불 위로 올려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구들, 즉 온돌은 취사를 할 떄나 방을 따듯하게 하는 것 모두 자연 법칙을 따르고 있다. 불 위에 솥을 얹고, 불 위에 사람과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을 얹어놓고 가열하는 원리안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차 한 잔의 이야기’에서 "그것은 아버지의 바지 눋는 냄새였다"는 추우면 열을 찾아가는 인간의 본성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열을 취하는가를 본능적으로 아는 데에서 생산된 에피소드이다. 빔슈나이더 부인의 아버지는 본래 그렇게 쓰게 되어 있지 않은 카헬오펜에서 구들에서 처럼 따듯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궁 구들에 불을 지피면…>
 몇 년 전 어느 겨울날 경복궁에서 독특한 행사가 있었따. 구들학회와 국립민속박물관이 주최해 경복궁 내 여러 구들 시설을 둘러본 다음, 자그마한 건물인 연길당에서 직접 불을 때보는 행사였다. 구들학회 사람들이 아궁이에 불을 땔 준비를 하자 건물 주변은 금방 1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찼다. 아궁이에 불을 때자 연기가 잠시 밖으로 도로 나오는 듯하더니 이내 불기가 아궁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침묵을 지키며 몇 분쯤 지났을 때 드디어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다행히 연길당의 구들 시설은, 연기가 조금 새는 곳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작동하였고 불때기 실험은 성공이었다.
 구들은 곧 온돌이며, 우리 조상들이 이미 기원전에 발명해 2000년 이상 끊임없이 사용하며 발전시켜 온 전통 바닥 난방 기술이다. 바닥 난방 기술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또한 전 민족이 어느 집에서나 그런 방법으로 난방하는 경우는 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유일하다. 그리고 바닥 난방은 지금까지 알려진 난방법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난방법이고 건강한 난방법으로 증명되고 있다. 구들은 그 외에도 지혜로운 부분이 않아 전통 요소적으로 과학 기술로 보나 가장 한국적인 특징의 하나이며, 세계에 드러내놓고 자랑해도 좋을 문화 유산인데 우리의 무관시 속에 잊혀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넣기’ 행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궁궐마다 구들 시설이 있고, 아궁이와 굴뚝이 있는데 그것들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며 작용 원리를 설명히 준다면 좋은 관광거리가 될 것다. 한두 건물의 구들시설은 더 완벽하게 손질하여 다실로 꾸미고 겨울에는 불을 지펴서 관광객들이 따끈한 방에서 잠시 쉬면서 난방 효과를 직접 느껴보게 한다면, 그리고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한국 명물인 인삼차를 마시게 한다면 우수한 우리 문화도 알리고 두고두고 기억되는 한국 관광이 되지 않겠는가.
혹자는 "불이라도 나면?" 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염두를 아주 배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들은 불을 쓴ㄴ 곳이긴 하지만 불에서도 주로 연기를 활용하는 것이며, 화재에 가장 안전한 난방법이다. 그래도 만약 우려가 된다면 충분히 대비하면 될 것이다. 소화기나 소방차가 있어 더 나아진 지금 불이 무서워 궁궐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불을 가장 지례롭게 지배한 민족의 후손답지 못한 일이기도 하다.
 겨울철 고궁 관광은 매우 썰렁하다. 관광객들이 구들에 불을 때는 모습이나 따뜻한 방바닥을 만져보며 쉬어가게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우리 궁궐에는 아궁이도, 아궁이로 통하는 통로도 굳게 잠겨 있다. 볼 수도 없고 설명해주는 이도 없고 불넣기 행사도 그 해 이후로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어렵다면 아궁이 속만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관광 산업은 부공해 산업이고 재료비도 별로 드는 것 없는 고수익 산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광 진흥을 외치면서도 벌로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한다. ‘수문장 교대식’처럼 구들도 좋은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처럼 크고 웅장한 것을 아닐지라도 우리 조상은 우리에게 구들을 물려주었는데 우리 후손은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옛날에는 새집 짓고 들어갈 떄 화로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불같이 가문이 융성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집에 온기가 없는 것은 버려진 폐가가 아니면 흉가다. 궁궐은 왕이 살던 곳이고 나라의 삼장이없다. 궁궐 구들에 불기를 살리는 것은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고궁 구들에 불을 지피면 볼거리도 늘고 관광 수입도 늘어 국민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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